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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반 박리 출산 후기 1탄, 평온했던 일요일을 뒤흔든 응급 상황, 둘째 출산 임박과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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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반 박리 출산 후기 1탄, 평온했던 일요일을 뒤흔든 응급 상황, 둘째 출산 임박과 119
일요일 오전 11시,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참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여느 주말처럼 첫째 딸아이와 나란히 앉아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흑백요리사 시즌2'를 보고 있었다. 요리사들의 현란한 칼질과 맛있는 음식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고, 우리 가족의 주말도 그렇게 평온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 평화는 아내의 짧은 비명과 함께 순식간에 깨지고 말았다.
농담이 현실이 된 순간
사실 조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내는 일주일 전부터 배가 자주 뭉친다며 불편함을 호소했었다. 출산 예정일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우리는 "이러다 애 나오는 거 아니야?"라며 반쯤 농담 섞인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둘째라서 그런지, 아니면 아직 예정일이 조금 남아서였는지 우리는 그 신호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하지만 아내가 화장실에서 다급하게 나를 불렀을 때, 그 농담은 무서운 현실이 되어 있었다.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것
화장실로 달려갔을 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변기 안이 붉은색으로 가득 찰 정도로 하혈 양이 상당했다. 줄줄 흐른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였다. 반도체 설계를 하며 수많은 변수를 예측하고 대응하는 일을 해왔지만, 막상 가족에게 닥친 응급 상황 앞에서는 머릿속이 멍해지고 손이 떨렸다. 소위 '멘탈이 나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절실히 깨달았다.
떨리는 손으로 119 버튼을 누르고 주소를 불렀다. 그리고 원래 다니던 동탄제일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휴일이라 그런지 통화 연결음만 길게 이어질 뿐, 병원과 닿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3분의 기적, 그리고 구급대원의 침착함
전화를 끊고 옷을 챙겨 입으려나 싶던 찰나,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신고한 지 3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대한민국 소방의 기동력에 놀랄 새도 없이 구급대원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구급대원은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병원 연락 여부를 물었다. 내가 당황하여 "전화 연결이 안 된다"고 답하자, 대원은 내 어깨를 다독이며 단호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연락하겠습니다."
그 한마디가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능숙하게 상황을 통제했고, 아내를 이동식 의자에 태워 신속하게 엘리베이터로 이동했다. 전문가들이 상황을 리드해주니 그제야 멈췄던 사고 회로가 조금씩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정신없는 와중에 놓친 것
아내가 구급대원들과 먼저 내려가고, 나는 뒤따라갈 채비를 했다. 미리 싸두었던 산모수첩, 지갑, 차 키를 챙기고, 놀란 첫째 아이에게 겉옷을 입혔다. 아이 손을 잡고 허둥지둥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시동을 걸고 병원으로 향했다.
운전대를 잡고 조금 진정이 되었을 때쯤, 뒷좌석이나 조수석을 돌아보다가 아차 싶은 순간이 찾아왔다. 아내의 신발이었다.
응급 처치와 이동에만 신경 쓰느라, 정작 아내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구급차에 실려 갔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맨발로, 혹은 양말 바람으로 차가운 이동식 의자에 앉아 실려 갔을 아내를 생각하니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응급 상황을 겪으며 배운 점
둘째 출산이라 어느 정도 안다고 자만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출산 가방을 싸놓는 것과는 별개로, 응급 상황 발생 시 '누가 무엇을 챙길지'에 대한 시뮬레이션이 필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 병원은 휴일에 연락이 잘 안 될 수 있다: 119 구급대원들은 병원 응급실 직통 라인이나 상황실을 통해 연결하므로, 개인이 연락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다. 위급 시엔 지체 없이 119를 불러야 한다.
- 보호자의 역할 분담: 당황하면 눈에 보이는 게 없다. 산모의 신발, 겉옷 등 사소하지만 필수적인 물품을 챙기는 것은 오로지 보호자의 몫이다.
평온했던 일요일 오전은 그렇게 사이렌 소리와 함께 긴박한 출산의 서막을 알렸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